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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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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인의 왕은 고대 로마 시대와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프랑스 제1제정에서 사용된 칭호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왕정 시대의 군주를 지칭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대관 전의 선출된 왕을 의미했다. 나폴레옹 1세는 아들 나폴레옹 2세를 '로마 왕'으로 칭했는데, 이는 황태자를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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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의 왕
로마인의 왕
상세 정보
유형칭호
사용 지역신성 로마 제국
최초 수여11세기
마지막 수여1806년
역할
역할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계승 후보
선출선제후에 의해 선출됨
역사적 배경
기원고대 로마 왕국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후신독일의 왕

2. 고대 로마의 왕정

고대 로마의 초기 정체는 왕정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왕정은 기원전 753년 초대 로마 왕 로물루스가 건국한 이후, 기원전 509년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위대한 타르퀴니우스’라는 뜻)가 추방될 때까지 이어졌다. 왕은 세습이 아닌 시민에 의해 선출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타르퀴니우스의 추방으로 왕정은 끝나고, 왕정에 대한 반성에서 공화정이 채택되었다. 이 이후 로마인들 사이에는 ‘왕을 두지 않는 국가 로마’라는 생각이 각인되어, 특히 동방의 전제 군주에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3. 제정 로마와 왕의 칭호

고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도시 국가의 틀을 넘어선 영역 국가로 발전하면서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은 서서히 붕괴되었고, 로마는 다시 전제 군주를 필요로 했다. 제2차 삼두 정치를 거쳐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의 여러 요직을 겸임하는 '''''프린켑스'''''(원수)로서 군림하며,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시작이다. 결과적으로 고대 로마는 왕의 칭호가 부활하지 않은 채 395년의 동서 분열을 맞이했다.

제정 로마에는 왕이 없었지만, 고대 말기의 수아송 관구에서 두크스(장군, 총감)를 맡았던 시아그리우스를 주변의 게르만족은 "로마인의 왕"으로 간주했다. 476년에 마지막 서로마 황제가 퇴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아(현재 프랑스) 북부에 있었던 수아송 관구에서는 로마인에 의한 지배가 유지되었고, 로마의 문화, 행정 체제,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그러나 486년에 수아송 관구도 프랑크 왕국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힌 "로마 왕" 시아그리우스는 이듬해에 살해당했다.

동로마 제국은 그 후에도 약 1000년 동안 존속했지만, 군주 칭호는 황제 헤라클리우스(재위: 610년 - 641년) 시대에 큰 변화가 있었다. 629년사산 왕조에 승리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선한 헤라클리우스는 "그리스도 신자의 바실레우스"라고만 칭했다. "바실레우스"는 "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라틴어의 "rex"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의미에서 헤라클리우스 이후의 동로마 황제(비잔틴 황제)는 "로마 왕"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황제라고 부른다. 동시대에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아우구스투스"라는 고전적인 칭호를 그리스어로 바꾼 "아우토크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오스, 세바스토스"라는 칭호는 병용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유럽 제국의 왕에게는 "렉스", 아시아계 민족에게는 "카가노스"를 사용하며, 자국의 군주인 "바실레우스"와 구별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전제 체제는 바실리오스 2세 (재위: 976년 - 1025년) 시대에 정점을 맞이했다.

4.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 왕

신성 로마 제국에서 '로마 왕'은 황제로 선출되기 전 단계의 군주, 또는 황태자를 지칭하는 칭호였다. 11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로마 왕 (Romanorum Rexla, Römisch-deutscher Königde, Roman-German King영어)은 제후들에게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군주가 칭한 칭호로, 로마 교황에 의한 정식 대관으로 (서) 로마 황제가 되기 전의 군주를 의미했다.

동프랑크 왕국에서 개칭된 게르만족 유래의 칭호이며, 그 왕권이 미치는 범위는 구 동프랑크 왕국, 즉 현재의 독일에 한정되었다.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로 추대되지 않거나 대립왕으로 세워진 경우, 후세에는 '독일 왕'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황태자의 칭호로도 사용되었으며, 근세 이후에는 이 의미로 한정되었다. 콘라트 2세에 의해 통치된 이탈리아와 부르군트에 대한 종주권을 갖는 로마 왕은 이탈리아 왕, 부르군트 왕으로도 간주되었지만, 대립왕이나 황태자로서의 왕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중세 초기 동프랑크 왕국은 작센 왕조의 하인리히 1세가 국왕이 되었을 때, 프랑크인이 통치하는 국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왕국", 그 왕도 단순히 "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프랑크 왕", 드물게 "동프랑크 왕"도 사용되었다. 이는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을 겸임하고 로마 황제가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을 통치하는지 나타내지 않는 단순한 "왕"의 칭호는 서유럽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권위를 가짐을 주장하기도 했다. "로마 왕"의 칭호가 갖는 권위는, 보다 구체적으로 로마 가톨릭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이념적 "로마 제국"에서의 세속적 정점임을 나타냈다.

"로마 왕" 칭호의 사용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빨라야 작센 왕조의 하인리히 2세, 늦어도 잘리어 왕조의 하인리히 3세 때부터이다.

4. 1. 역사와 용법

11세기 이전에는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독일 왕국' 또는 'Regnum Teutonicum'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시기 왕의 대관 주장은 교황과의 갈등, 특히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졌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 의해 황제로 대관될 자격을 강조하기 위해 ''Romanorum Rex'' (로마 왕) 칭호를 사용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의 권위가 독일 지역에 국한되며, 가톨릭 세계 전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Teutonicorum Rex'' (게르만족의 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대립 교황클레멘스 3세에 의해 황제로 대관될 때까지 ''Romanorum Rex'' 칭호를 사용했고, 이후 황제들은 대관 전에는 '로마 왕', 대관 후에는 '로마 황제' (''Romanorum Imperator'')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 군주제였기 때문에, 황제의 친족이라도 자동 계승권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친족(주로 아들)을 후계자로 선출하도록 할 수 있었고, 이렇게 선출된 황태자는 '로마인의 왕' 칭호를 사용했다. 중세 시대에는 황제가 있을 때만 로마인의 왕을 선출하여 두 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피했다. 예외적으로 콘라트 3세와 그의 후계자 헨리 베렌가르가 동시에 로마인의 왕으로 존재한 적이 있다(1147년-1150년).[1] 16세기부터는 황제들이 교황의 대관 없이 '선출된 황제' 칭호를 사용하면서, 로마인의 왕 칭호는 전임자 생전에 선출된 후계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2]




로마 왕은 여러 제국 신분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7명의 선제후의 과반수 투표로 선출되도록 규정되었다. 카를 4세는 로마 왕위의 법적 지위를 강화하여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했지만, 결과적으로 카를 4세 이후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른 사람은 지기스문트프리드리히 3세뿐이었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은 마지막 황제는 1530년 볼로냐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카를 5세였다.




선출된 왕은 아헨 대성당에서 쾰른 대주교의 집전으로 로마 왕(''Romanorum Rex'')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936년 오토 1세의 대관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코르베이의 비두킨트가 저술한 ''Res gestae saxonicae''에 기록되어 있다.




로마 왕은 가능하면 알프스를 넘어 파비아(나중에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 철관으로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고, 로마에서 교황에게 황제로 대관했다. 그러나 모든 로마 왕이 이 절차를 완료한 것은 아니며, 로마 원정을 완료하지 못한 왕도 있었다. 이 경우에도 군주로서의 칭호는 로마 왕으로 유지되었다.




1508년, 막시밀리안 1세는 교황에게 '선택된 로마 황제'(''Electus Romanorum Imperator'') 칭호를 허가받았다. 이후 로마 왕은 로마에 가지 않고도 로마 황제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를 5세는 정식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이것이 교황에 의한 마지막 대관이었다. 이후 로마 왕은 즉위하면 즉시 로마 황제로 간주되었고, 로마 왕 칭호는 군주호로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독일인의 왕'(''Germaniae rex''), '독일에서의 왕'(''König in Germanien'')이라는 새 칭호를 채택했지만, 후자는 겉으로 드러내어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공동 왕으로서의 로마 왕은 존속했다. 황제는 후계자를 로마 왕으로 선제후에게 선출하게 했고, 로마 왕은 실질적으로 황태자의 칭호가 되었다. 동시에 로마 왕의 대관식은 아헨이 아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거행되었다. 황제가 재위 중 후계자를 선출하지 못했을 경우, 로마 왕으로 선출되어 대관한 군주는 즉시 황제로 간주되었다.

4. 2. 중세 시대의 로마 왕 선출

초기에는 왕위 후보가 게르만족의 줄기 공작령의 수장 중에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단위가 해체되면서 더 작은 공국과 비게르만 통치자도 후보가 될 수 있었다. 후보자의 조건은 성인 남성이며, 가톨릭 신자이고, 성직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왕은 여러 제국 신분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그중에는 주교와 같은 성계 제후도 포함되어 있었다. 1147년 이후, 선거는 제국 도시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2]

원래는 모든 귀족의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지만, 나중에는 실제 선거권이 고위 귀족과 주교로 제한되었다.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황제 카를 4세는 로마 왕이 7명의 선제후의 과반수 투표로 선출되도록 규정했다. 선제후의 구성은 이미 1338년의 렌스 선언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보헤미아 왕, 라인 궁정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었다.[2] 카를 4세는 로마 왕위의 법적 지위를 강화하여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했지만, 결과적으로 카를 4세 이후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른 사람은 지기스문트프리드리히 3세뿐이었다. 교황의 손으로 제관을 받은 마지막 황제는 1530년에 볼로냐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카를 5세가 되었다.[2] 한편, 로마 왕의 선출 방법을 정한 금인칙서는 1806년 제국 해산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4. 3. 후기 발전과 황태자 칭호

1508년, 막시밀리안 1세는 교황으로부터 '선출된 로마 황제' 칭호를 허가받았다.[1] 이후 로마 왕은 로마를 방문하지 않고도 황제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독일인의 왕'이라는 새로운 칭호도 사용했지만, 주요 칭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1]

카를 5세는 전통적인 대관식을 치렀으나, 교황에 의한 대관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페르디난트 1세부터는 교황의 승인 없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 군주제였기 때문에, 황제는 자신의 친족을 후계자로 선출하여 "로마인의 왕" 칭호를 사용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칭호는 황태자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선거는 황제 선거와 동일한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실제 제국 행정은 황제가 관리했다.

4. 4. 역대 로마 왕 목록 (군주)

다음은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왕' 칭호를 사용했던 군주들의 목록이다. 여기에는 대관식을 통해 정식 황제가 된 인물과 대관식 없이 '로마 왕' 칭호만 받은 인물이 모두 포함된다. 대립왕도 포함되어 있다.

왕위 시작왕위 종료비고
오토 3세983년996년정식 황제[1]
하인리히 2세1002년1014년정식 황제[1]
콘라트 2세1024년1027년정식 황제[1]
하인리히 3세1039년1046년정식 황제[1]
하인리히 4세1056년1084년정식 황제[1]
라인펠덴의 루돌프1077년 5월 25일1080년 10월 15일하인리히 4세의 대립왕, 전투에서 사망[1]
잘름의 헤르만1081년 8월 6일1088년 9월 28일하인리히 4세의 대립왕, 전투에서 사망[1]
하인리히 5세1105년1106년하인리히 4세의 대립왕 (1105년-1106년), 1111년부터 정식 황제[1]
로타르 3세1125년1133년정식 황제[1]
콘라트 3세1127년1135년로타르 3세의 대립왕[1]
1138년1152년[1]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52년1155년정식 황제[1]
하인리히 6세1190년1191년정식 황제[1]
필립1198년1208년[1]
오토 4세1198년1208년필리프의 대립왕[1]
1208년1209년정식 황제[1]
프리드리히 2세1212년1220년정식 황제[1]
헨리 라스페1246년 5월 22일1247년 2월 16일프리드리히 2세의 대립왕, 사망[1]
홀란드의 윌럼1247년 10월 3일1256년 1월 28일1254년 5월 21일까지 대립왕, 사망[1]
콘라트 4세1250년1254년[1]
콘월의 리처드1257년 1월 13일1272년 4월 2일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의 대립왕, 사망[1]
알폰소 10세1257년 4월 1일1275년콘월의 리처드의 대립왕, 주장을 포기함[1]
루돌프 1세1273년1291년[1]
아돌프1292년1298년[1]
알브레히트 1세1298년1308년[1]
하인리히 7세1308년1312년정식 황제[1]
루트비히 4세1314년1326년공정왕 프리드리히와 대립[1]
1326년1328년공정왕 프리드리히와 공동 통치, 정식 황제[1]
공정왕 프리드리히1314년1326년루트비히 4세의 대립왕[1]
1326년1330년루트비히 4세와 공동 통치, 사망[1]
카를 4세1346년1347년루트비히 4세의 대립왕[1]
1347년1355년정식 황제[1]
귄터 폰 슈바르츠부르크1349년 1월 30일1349년 5월 24일카를 4세의 대립왕, 사망[1]
바츨라프 4세1378년1400년[1]
루프레히트1400년1410년[1]
모라비아의 요프스트1410년 10월 1일1411년 1월 8일지기스문트의 대립왕, 사망[1]
지기스문트1410년1411년요프스트의 대립왕[1]
1411년1433년정식 황제[1]
알브레히트 2세1438년1439년[1]
프리드리히 3세1440년1452년정식 황제[1]
막시밀리안 1세1493년1508년황제 직위를 가졌다고 간주됨[1]
카를 5세1519년1530년정식 황제[1]


4. 5. 역대 로마 왕 목록 (황태자)

1212년에 오토 4세의 대립 왕으로 재 즉위
1220년에 황제 대관아들하인리히 6세하인리히 (7세)12201235폐위아들프리드리히 2세콘라트 4세12371250왕위 계승아들프리드리히 2세벤체슬라오13761378왕위 계승아들카를 4세막시밀리안 1세14861493왕위 계승 (황제 대관 1508년)아들프리드리히 3세페르디난트 1세15311558제위 계승동생카를 5세막시밀리안 2세15621564제위 계승아들페르디난트 1세루돌프 2세15751576제위 계승아들막시밀리안 2세페르디난트 3세16361637제위 계승아들페르디난트 2세페르디난트 4세16531654사망아들페르디난트 3세요제프 1세16901705제위 계승아들레오폴트 1세요제프 2세17641765제위 계승아들프란츠 1세


5. 프랑스 제1제정의 로마 왕

나폴레옹 1세는 통령 정부를 거쳐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아우구스투스를 본떴고, 대관식에서도 중세풍으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았다. 프랑스 황제는 고대 로마 황제나 신성 로마 황제와 관련성은 없지만, 강하게 의식한 칭호였다. 나폴레옹 1세는 아들 나폴레옹 2세(1811년 - 1832년)가 태어났을 때 '로마왕'으로 칭했다. 이는 '로마의 왕'(Roi de Rome)이지 '로마인의 왕'은 아니지만, 황태자라는 의미는 같다. 나폴레옹 2세는 짧은 생애 동안 '로마왕'으로 불렸지만, 1818년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원래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정식으로 라이히슈타트 공작 칭호를 수여했다.[1]

나폴레옹 2세

참조

[1] 서적 Heinrich Schütz (1585–1672). Kulturpatriotismus und deutsche weltliche Vokalmusik. "Zum Auffnehmen der Music, auch Vermehrung unserer Nation Ruhm" 2004
[2] 서적 Neue Beiträge zur geschichtlichen Landeskunde Tirols. Festschrift für Univ. Prof. Dr. Franz Huter anlässlich der Vollendung des 70. Lebensjahres. Wagner, Innsbruck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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